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트 체임벌린 (문단 편집) == 압도적인 개인 기록에 비해 우승을 많이 하지 못한 이유 == 위에 언급되듯이 체임벌린은 개인 퍼포먼스와 스탯에 관해선 NBA역사 전체에서도 독보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라이벌 빌 러셀이 이끄는 보스턴 셀틱스와 거의 매년 플레이오프에서 붙으면서 단 한번을 제외하곤 매번 패했다. 후대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 의아해하면서 "빌 러셀이 더 뛰어난 동료들과 뛰어서 그렇구나."하고 단정짓곤 하는데, 물론 전반적으로 러셀의 동료들이 체임벌린의 동료들에 비해 수준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팀 동료들의 수준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마이클 조던이 등장하기 전까지 빌 러셀은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불렸고, [[매직 존슨]]같은 선수들은 "조던은 최고의 선수지만, 빌 러셀은 최고의 승리자다."라고 하는 등 러셀은 단순히 동료복이 좋기만 한 선수는 아니었다. 또한 반대로 체임벌린의 동료들이 러셀보다 더 강한 적도 있었는데, 이때 체임벌린이 승리를 챙기지 못한 적도 있었다. 즉, 체임벌린의 압도적인 스탯에 가려진 점이 분명 있었던 것이다. ---- * 체임벌린은 물론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고 개인기량으론 가장 압도적인 선수였지만, '스탯 부풀리기'의 의혹이 있다. 100득점 경기 당시에도 약체 닉스를 상대하면서[* 안 그래도 약체였던 닉스는 주전 [[센터(농구)|센터]]겸 [[포워드(농구)|포워드]]였던 필 조던은 결장해 상대가 안되는 상황.] 승부가 3쿼터에 사실상 갈렸는데도, 계속 뛰면서 4쿼터에만 당시 한쿼터 최다득점 기록이던 31점을 기록했다. 전설의 50-25 시즌 당시 그는 경기당 평균 48분을 넘게 뛰었는데, 이는 체임벌린의 우월한 신체능력을 보여주지만 뒤집어 말해보면 승부가 이미 갈린 상황에서도 계속 뛰면서 스탯을 쌓았다는 말이다. 그는 개인스탯에 매우 신경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고, 본인의 우월한 스탯이 본인이 러셀보다 우월한 근거라고 몇번이나 강조한 적이 있다. 전설적인 감독 잭 램지에 따르면 그는 경기 도중에도 본인이 얼마나 스탯을 기록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기록원에게 "내 리바운드 기록이 잘못 나왔다."고 지적한 다음, 고치는 것을 [[http://static.espn.go.com/nba/columns/drjack_ramsay/111128.html|직접 확인한 적도 있다고 한다.]] 체임벌린은 빌 러셀을 상대로 플레이오프에서 25.7점을 기록했다. 그가 정규시즌에 러셀을 상대하면서 평균 34.4점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거의 10점 가까이 떨어진 기록이다. 또한 평균 50점을 기록한 1961-62 시즌의 경우 플옵 1라운드에서 37점, 2라운드에서는 보스턴을 상대로 33.6점을 기록했다. (통합 평균 35점) 그와 동시대 라이벌인 러셀과 비교해보면 체임벌린은 리바운드를 제외하곤 득점/어시스트/자유투성공률/필드골 성공률이 모두 플옵에서 정규시즌에 비해 하락했지만, 러셀은 필드골 성공률을 제외하고 득점/리바운드/어시스트/자유투 성공률이 모두 플옵에서 상승했다. 체임벌린과 더불어 역대 최고의 득점원으로 평가받는 마이클 조던의 경우에도 플옵 득점 기록이 정규시즌에 비해 3점이나 높지만 체임벌린은 8점 가까이 떨어진다. 물론 체임벌린은 커리어 후반기에 득점보다 수비/리바운드/어시스트에 더 집중하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가 연속으로 득점왕을 차지하던 첫 7시즌만 놓고 보더라도 정규시즌에서는 39.6점, 플옵에서는 32.8점을 기록했다. 그는 플옵에서 최고의 득점원도 아니었다. 체임벌린이 포스트시즌 평균 득점 1위를 차지한 적은 단 한번, 1963-64 시즌(34.7점) 뿐이며 그 외에는 엘진 베일러, 제리 웨스트 등이 1위를 차지했다. 반면 조던의 경우 포스트시즌 13번 중 1위를 차지한 게 10번에 달한다. 물론 1985-86, 1986-87 시즌은 고작 3경기만 뛰어서 표본의 신뢰도가 떨어지지만 그 외에는 최소 16경기를 뛰며 1위를 차지했으며, 특히 우승을 차지한 시즌 중에는 정규시즌/플옵 평균/총득점 1위를 놓친 적이 한번도 없다. 반면 체임벌린이 우승을 차지했을 때는 정규시즌/플옵 평균이 24.1/21.7이었고 당연히 총득점 1위와도 거리가 멀었다. 1962 플옵 당시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이 붙은 1차전에 대한 [[https://news.google.com/newspapers?id=6MEVAAAAIBAJ&sjid=4RAEAAAAIBAJ&pg=5891,3230163&dq=&hl=ko.|기사]]를 보면 1, 2번에서 지적한 점들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기사에는 러셀이 이끄는 보스턴의 팀 수비 덕에 필라델피아를 117대 89로 승리했다고 나왔다. 당시 체임벌린은 33점을 넣었지만 전반전에는 빌 러셀 때문에 12점에 그쳤는데 이때 보스턴은 점수차를 15점까지 벌리며 승부를 사실상 결정지었다고 한다. 승부가 사실상 갈린 후반에 21점을 넣은 것인데, 스탯상으로는 체임벌린의 승리지만 진정한 승자는 중요한 순간에 체임벌린을 묶으며 팀을 승리로 이끈 러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체임벌린이 후반에 추가한 득점은 승부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팀은 대패했으므로... 또한 최종 7차전에서는 정규시즌 평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22점에 그쳤으며 필드골 7개를 시도하는데 그쳤다. 팀내 최다 득점자는 32점을 기록한 Tom Meschery였는데, 이처럼 중요한 경기에서 체임벌린이 쪼그라든 것은 한 두번이 아니었다. * (우승하기 전까지) 체임벌린은 팀을 돕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전설적인 포인트가드 밥 쿠지가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체임벌린과 러셀은 블록 슛 갯수가 비슷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러셀은 블록을 할때 치밀하게 계산해서 팀 동료들에게 공이 가도록 블록을 하고, 이로 인해 러셀의 수비는 속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상대방을 압도하기 위한 목적+관중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볼을 관중으로 뻥뻥 쳐내곤 했다. 이런 플레이는 심지어 그가 스타일을 바꾼 후인 레이커스 시절까지 이어졌는데, 이에 대해 당시 레이커스 감독인 Butch van Breda Kolff는 "러셀은 블록 이후 플레이를 전개하는데, 체임벌린은 관중석으로 쳐내니까 공격권이 상대에게 돌아간다."고 불평한 바 있다. 그러자 체임벌린은 "보스턴 선수들은 러셀의 블록 슛을 잡아내도록 훈련을 받는단 말이오."라고 받아쳤다. 물론 전체적으로 러셀이 체임벌린보다 더 뛰어난 동료들과 뛴 것은 사실이지만, 1969 파이널 당시 늙고 병든 셀틱스와 붙으면서, 베일러-웨스트라는 명예의 전당급 동료들을 데리고도 7차전 홈에서 패한 건 체임벌린 본인이다. 또한 체임벌린은 1965년, 11승 33패로 무너져가던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에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트레이드되었는데, 이때 필라델피아는 체임벌린 합류 이전 22승 23패, 체임벌린 합류 이후 18승 17패로 별 차이가 없었다.[* 아무리 본인의 기량이 훌륭해도 팀을 승리로 이끌지 못한다면 팀스포츠에서 박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팀스포츠의 가장 큰 목적은 팀이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 역대 최고의 선수라 불리는 마이클 조던은 1994-95 시즌에 야구하다 복귀해서 제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34승 31패를 달리던 팀을 13승 4패로 이끌면서 확실한 임팩트를 남겼다. 또한 전성기와 비교도 안됐던 워싱턴 시절에도 19승에 그치던 팀이 조던의 합류로 37승으로 거의 두 배나 뛰었다.] * 그는 중요한 시리즈에서 침묵했다. 1967년에 우승을 차지한 윌트 체임벌린은 더 이상 팀원들의 지원이 없다고 할 위치가 아니었다. 1968년 동부결승 당시 필라델피아는 늙어가는 보스턴 셀틱스를 맞이해 홈코트 어드밴티지와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또한 당시 필라델피아는 4차전까지 3대1로 앞서고 있었는데, 당시까지 역사상 어떤 팀도 3대1로 앞서다가 역전당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셀틱스는 결국 이를 뒤집는데 성공했는데, 7차전에서 그는 무려 34개나 리바운드를 잡았지만, 슛 9개를 던져 14점을 넣는데 그쳤다. 또한 7차전 후반에서는 단 하나의 슛도 던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체임벌린의 반응은 리더로서 매우 실망스러웠는데, 그는 자신의 감독 알렉스 해넘이 "감을 잃었다."고 비난한 것. 해넘이 명감독으로 알려져 있고 그가 부임한 이후에 체임벌린이 첫 우승을 차지한 걸 생각하면 그가 패배의 책임을 지지 않고 감독탓만 한 것은 에이스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또한 본인의 자서전에서 "동료들이 슛을 대부분 쏴서 3분의 1밖에 못 넣었는데, 나만 탓한다"고 불평했다. 이는 마지막 이유와도 관련이 있는데 * 체임벌린은 좋은 리더도 팀메이트도 아니었다. 이 부분은 그가 1960~70년대에 활동했기 때문에 당시의 정황을 볼 수밖에 없어 확신하긴 힘든 부분이긴 하다. 그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와의 1965년 인터뷰기사 "My life in a bush league"에서 동료, 감독, 그리고 NBA 관계자들을 싸잡아 비난한 적이 있는데, 체임벌린의 대중적 이미지가 영구적으로 망가지기 시작한게 이 때문이다. 실제로 다른 선수들도 체임벌린과 뛰는 걸 꺼렸다. 필라델피아 워리어스가 샌프란시스코로 이전한 이후, 팀은 체임벌린을 처분하고자 했는데 당시 레이커스 구단주는 체임벌린 영입을 두고 선수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했으나 9대2로 부결되었다. 당시 베일러, 웨스트가 이끌던 레이커스는 결승에 올라가는 족족 패하는 상태라 우승에 고픈 상태였는데도 리그에서 가장 압도적이었던 [[센터(농구)|센터]]과 함께 뛸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버린 것이다. 체임벌린이 얼마나 악명이 높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결국 몇년 더 고생하던 레이커스는 1968년에 체임벌린을 데려오고 만다.] 우승하기 직전 감독이었던 돌프 셰이즈와의 에피소드도 유명한데, 선수시절 레전드 빅맨이었던 셰이즈는 현역시절 체임벌린과 자주 맞붙으며 충돌이 있어서 둘의 사이가 서로 안 좋았다. 이러한 악연은 셰이즈가 체임벌린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도 이어졌는데 당시 체임벌린은 필라델피아 선수였지만 뉴욕에서 살면서 필라델피아로 출퇴근했다.[* 뉴욕과 필라델피아 사이 거리는 직선거리로 130km, 차도로 150km에 달하며 뉴욕시까지 가는데만 최소 두시간이 걸린다. 거기다가 뉴욕 내 교통상황까지 생각하면...] 거기다 체임벌린은 늦잠을 자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맞추기 위해 셰이즈는 팀 연습을 오후 4시로 잡았고, 이로 인해 오전에 연습하고 오후에 자유시간을 받길 원했던 다른 선수들은 불만이 폭발했다. 이에 당시 팀 구단주였던 어브 코슬로프는 그에게 필라델피아로 이사올 것을 요청했지만 체임벌린은 이를 거절했다. 1966년 보스턴과의 시리즈에서 체임벌린의 재멋대로인 성격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당시 필라델피아는 홈 1, 2차전을 모두 패배하고 3차전을 원정에서 겨우 잡았다. 4차전까지 지면 벼랑끝까지 몰리는 상황에서 셰이즈는 3차전 다음날 팀 연습을 잡았는데, 체임벌린은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거절했고 "그냥 와서 자유투 연습이라도 해라."는 셰이즈의 요청도 거부한다. 그리고 4차전에는 필라델피아는 패배하고 만다. 이어진 5차전 직전 연습에서도 체임벌린은 별 이유없이 잠적해버린다.[* 대외적으론 감독이 "열외처리"한 것으로 되었지만 팀 동료들은 진실을 알고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출처: 윌트 체임벌린 전기 Larger than life.] 이 외에도 그는 종종 동료들과 감독을 비난한 바 있다. 물론 버드같은 선수들도 1984년 결승에서 3차전 패배 이후 "나를 포함해 우리들이 기집애처럼 뛴다."고 비난한 바 있지만 이는 본인을 포함한 비난이었고, 이 발언 이후 셀틱스 선수들은 힘을 내 시리즈를 역전시켜버린다. 또한 셀틱스 선수들 사이에선 상호존중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 발언 이후 "저 새x가 우리를 욕해?"가 아니라 "우리가 오죽하면 저 친구가 저러겠냐. (실제로 셀틱스 선수들의 경기력은 버드를 제외하고 형편없었다.) 좀 더 빡세게 하자"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체임벌린은 이런게 아니라 "얘들이 더 못하는데 왜 나만갖고 그러냐"식의 책임전가였다는 게 문제다. ---- 종합해보면 어떤 기준으로 봐도 당시 윌트 체임벌린이 매우 뛰어난 선수였던 것은 확실하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히면 위에 언급된 "스탯 부풀리기"란 것은 평균 40-18을 할 선수가 50-20을 넘기는 수준의 부풀리기지, 애초에 체임벌린은 당대에 막을 존재가 없었고 어떤 경우에서건 비상식적인 스탯을 찍었을 것이 명백한 선수다. 이 문단의 목적은 체임벌린의 위력을 폄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왜 저렇게까지 개인기량이 압도적인 선수가 팀성적 면에서는 그만큼 뛰어나지 못했을까'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현재 그의 업적으로 봐도 역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선수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본인이 매치업을 압도해도 체임벌린이 팀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은 조던이나 러셀같은 선수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스탯을 너무 의식했던 것도 문제인데, "팀만 이긴다면 스탯 따위 상관없다."는 마인드로 접근했던 러셀이나, "승리를 위해 뭔 짓거리든 한다."는 마인드의 조던과 달리 체임벌린은 "내가 이 정도 스탯을 쌓는데도 팀이 지는데 그게 내 탓이냐."고 한 적이 많았다. 은퇴 이후에도 체임벌린은 스탯 얘기를 굉장히 많이 했는데, 보통 탑텐이라고 분류되는 선수들 중 자기 스탯에 대해 그렇게 강조하는 선수는 체임벌린 뿐이다. 그는 자신과 조던의 비교에 대해 "조던이 50점을 넘긴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나는 평균 50점을 기록한 적도 있다."고 했는데, 정작 중요한 플레이오프에서는 조던이 체임벌린보다 월등히 높은 득점을 기록했다. 다른 걸 다 떠나 팀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다. 체임벌린이 아무리 개인기량이 뛰어났다고 해도 커리어 내내 원맨팀에서만 뛰었던 것도 아닌데 동시대 라이벌인 러셀에 비해 우승 횟수가 11대 2로 밀린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애초에 체임벌린의 팀은 보스턴이 서서히 하락세를 그리던 [[1966년]]부터 4년 연속으로 러셀의 팀보다 더 좋은 정규시즌 성적을 거뒀고 멤버도 더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 않았다. 특히 1969년에는 늙고 병든 보스턴보다 훨씬 더 강력한 멤버들과 함께 했다.[* 참고로 1969년의 웨스트-베일러-체임벌린 라인이 얼마나 사기적이었냐면 체임벌린과 베일러는 바로 직전 시즌에 올 NBA 퍼스트팀 (NBA의 베스트 5라고 보면 된다.)에 뽑혔고, 웨스트는 세컨팀에 뽑혔다. 게다가 웨스트가 세컨팀이라고 무시못할 것이, 그는 1962년부터 1967년까지 6년 연속 퍼스트팀에 올랐다가 1967-68, 1968-69 시즌 세컨팀, 1969-70 시즌부터 다시 4년 연속으로 퍼스트팀에 오른 선수다. 즉, NBA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선수들 중 세명이자 당대 최고의 [[센터(농구)|센터]], [[포워드(농구)|포워드]], [[가드(농구)|가드]]가 뭉친 것. 심지어 체임벌린은 1967-68 시즌 MVP였다. 현재로 따지면 2014-15 시즌이 끝나고 나서 MVP 스테판 커리와 르브론 제임스, 앤서니 데이비스가 한 팀으로 뭉친 셈이다. 게다가 웨스트와 베일러는 하필 체임벌린, 러셀과 전성기가 겹쳐 MVP가 하나도 없지만, 다른 시대였으면 MVP 쯤은 한두번 충분히 타고도 남을 선수들이었다.], 그런데도 러셀은 자기가 불리한 상황에서 네번 연속 체임벌린의 팀과 맞붙어 이 중 세번의 시리즈를 따냈다. 즉, 체임벌린과 러셀의 차이는 팀빨만이 결코 아니었다. [각주] [[분류:미국의 농구 선수]][[분류:필라델피아 출신 인물]][[분류:1936년 출생]][[분류:1958년 데뷔]][[분류:1973년 은퇴]][[분류:1999년 사망]][[분류:NBA 영구결번 선수]][[분류:센터(농구)]][[분류: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은퇴, 이적]][[분류: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은퇴, 이적]][[분류: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은퇴, 이적]][[분류:NBA MVP]][[분류:심장마비로 죽은 인물]][[분류: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분류:캔자스 대학교 출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